여러분 안녕하세요. 한국 현대 문학 코너에 아주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사실 마지막 시간까지 배운 내용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아직 머릿속에 정리가 안돼서 글을 쓰질 못했어요. 그 부분은 나중에 시간을 가지며 정리하도록 할게요.  

 

 오늘은 마지막 시간에 배운 김소월 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해 포스팅을 할 거예요. 시간이 부족해서 작품을 몇 개 다루지 못했지만, 일단 다룬 작품 먼저 올리고 나머지 추가하도록 할게요.

 

 먼저 김소월 시인의 본명을 알아봅시다. 그의 본명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김정식입니다. 문학가 들은 대부분 필명을 쓰는 걸 즐겨 한다고 하죠? 때문에 우리는 그 필명을 실제 이름으로 아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죠. 어쨌든 그의 이름이 김소월로 더 많이 알려져있기에 저는 여기서 김소월 시인이라고 언급하겠습니다.

 

 김소월 시인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김안서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김안서 선생님은 한국 최초로 자유시를 번역한 사람인데, 그는 김억이라고 알려져있기도 합니다. 김소월 시인은 김안서 선생님의 도움으로 창조 2호에 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 전통, 민요 시인이라고 합니다. 이는 작품을 보다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시로 들어갑시다.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나는 꿈꾸었노라 (현실과 반대),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벌판) 가의 하루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 보습대일 땅이 있다고 꿈을 꿈.

 

그러나(현실로 돌아와서)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 새롭은(평안도 방언 : 새롭고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 2연에서 제목의 시구가 똑같이 반복됩니다. 여기서 보습대일 땅이란 소리는 쟁기를 댈 땅, 즉

농사지을 땅이란 것입니다. 이 시는 1920년대에 쓰였는데, 그 당시에는 역사적으로 일제 치하하에

우리나라의 농민들은 토지 조사 사업의 영향으로 많은 토지를 빼앗겼고 산미 증식 계획으로 쌀을

일본으로 많이 착취당했던 때였습니다. 바로 이 시의 제목이 그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 떠돌아다니는 생활. (그 당시 땅이 없었던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산에 불을 질러 나무를 없애고 땅을 만들어 농사짓는 화전민이 되거나,

                                         또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위해 만주나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 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 희망을 가져보려고 하지만, 거친 물결에 그것이 좌절된다는 것입니다.

'가슴과 팔다리에' 이 표현은 환유법인데 환유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슴과 팔다리에 희망이 없다는 것은, 몸이 아픈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일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엇지면(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그러나로 다시 역접)

자칫 가느른 길이 이어가리. 나는 나아가리라 -시적 화자의 의지적 태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 비탈엔 -삶의 고난을 넘어야 하는 그 길

온 새벽 동무들 저저 혼자 산경(산을 개간해서 농사짓는)을 김매이는

 

 이 시는 농사지을 땅이 없는 현실을 표현한 시입니다. 이 시를 통해 김소월 시인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대한 고발을 하는 시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반가워요 여러분. 2학기가 시작되면서, 저는 새로 시작한 한국어 문학부라는 복수 전공과목을 듣게 됐어요. 사실, 개강하고 많이 바쁘네요. 그렇지만, 공부에 소홀히 할 수 없겠죠?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컴퓨터로 요약정리해서 나중에 시험을 대비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보다 여기에 여러분과 같이 제가 배운 내용을 공유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포스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참고로 교재는 이 책을 사용합니다. 교수님께서 이 책이 처음 발간됐을 당시의 책을 가지고 계셔서 저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95년도면 제가 4살 때인데, 아주 오래된 책으로 공부를 해서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것 같네요.

 

 사실, 저는 꿈이 영어 교수였는데 수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저는 언어를 좋아해서 훗날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해당 국가로 취업을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학교에 있는 한국어 문학부 복수전공을 하게 됐죠. 이 과정을 끝내면 한국어 교원 자격증 2급을 준답니다. 물론, 타과지만 졸업시험도 쳐야 하고, 들어야 할 과목 수가 다른 과 복수전공에 비해 많지만 말이죠.

 

 서론이 많이 길었군요. 아무튼, 이번에 듣게 되는 과목의 이름은 '한국 현대 문학의 이해'라는 과목입니다. 시부터 소설까지 많은 작품을 다루려고 교수님께서 계획 중이신데요? 제가 한 부분씩 다 배우고 포스팅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 포스팅을 몰아서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에, 그날 배운 내용을 그날 포스팅하고 더 배운 내용을 밑에 추가하는 형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문학에 대해 배웠어요. 문학은 무엇이다 하는 정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문학 작품을 보는 관점, 느끼는 부분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문학 작품 역시 한 결과로만 보기는 힘들죠. 이렇게 보면 문학은 개인의 생각에 의해 해석될 수도 있지만, 다행히 문학의 논의에는 일관성과 체계성이 있습니다. 애브람스(Abrams) 라는 사람이「거울과 램프」라는 책에서 문학과 관련된 것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작품, 작가, 독자, 세계 이렇게 4가지가 그의 설명의 기본 요소입니다. 보기 쉽게 그림 형식으로 그려볼게요. 애브람스가 저 4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4가지의 문학론을 만들어냈죠.

 

 

 그림이 눈에 잘 보이시나요? 먼저, 모방론부터 보겠습니다. 모방론 작품과 세계 사이에 적혀 있죠? 그렇기에, 모방론은 세계를 중심으로 작품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작품은 현실세계의 모방이라는 것이 그 관점인데요? 고전주의 문학이 이러한 성질을 띄고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모방론은 나중에 근대에 이르러서는 반영론으로 발전합니다. 반영론은 또 근대 이후의 리얼리즘에 또 연결되고요. 즉, 모방론 -> 반영론 -> 리얼리즘. 이런 순서가 그려지네요. 반영론은 모방론에서 나온 생각답게, 세계를 바라보는 부분이 있지만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작가의 시각(관점)으로 바라봅니다. 때문에, 모방론과는 조금 차이가 있죠.

 

 다음은 작가와 작품의 관계인 표현론입니다. 이는 작품을 작가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지요.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작품에 표현되어 우리는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표현론은 낭만주의 문학에서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소설과 희곡보다는 시에서 더 많은 관련이 있고요.

 

 다음은 작품과 독자의 관계에서는 효용론이라는 문학관이 나옵니다. 위의 표현론은 작가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효용론은 반대로 독자에게 시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문학이 인간에게 쾌락이나 교훈을 준다고 합니다. 효용론을 조금 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두 가지 효용이 있는데, 첫 째는 위에서 언급한 쾌락(카타르시스)을 주는 정서적 호용과 교훈(권선징악)을 주는 윤리적 효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카타르시스는 '비극으로써 마음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정화되는 .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비극관객미치는 중요 작용하나 것이다.' 이렇다고 네이버 사전이 설명하고 있군요.

 권선징악은 여러분이 잘 아실 거예요.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라. 이것이죠? 학창시절 문학 시간에 잘 들을 수 있었던 표현이 아닌가 싶네요. 아무튼 이번 단락에 있는 두 가지가 바로 효용론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객관적 존재론이라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는 작품 그 자체만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가령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의 작품이 무조건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는 논점에서 바라보는 것이지요. 만약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작가가 개입되면 의도의 오류를 범한다고 보았고, 작품을 읽는 독자의 취향의 경우에 따라 감정의 오류를 행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관점은 20C부터 시작된 관점으로 문학을 운율, 언어 등의 형식과 비유, 모티브 등의 내적 구조로 분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표현론, 모방론, 효용론, 객관적 존재론에 대해 알아봤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문학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합니다.